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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김공만희전

경학원 대제학 춘포 공성학

 

사대부(士大夫)로서 임금의 녹을 먹다가 불행하게 혁명의 즈음을 만나 능히 정절(靖節)로 스스로 지킨 사람은 역사책에 상고해 봐도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를테면 기자(箕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한 것¹ 이나 백이(伯荑)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은 것은² 오래되었거니와, 아래로 매복³(梅福) 관녕⁴(管寧)의 무리가 거취(去就)는 비록 달랐으나 그 확고하게 지켜 굽히지 않은 뜻은 본디 같은 바이다. 고려말에 왕이 양위(讓位)하던 날을 당하여 포은(圃隱)⦁목은(牧隱) 같은 분의 높은 절개는 해와 별처럼 나타나서 천고(千古)에 빛났으며,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들이 신왕조에 신하되지 않는 의리를 지켜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한 이는 이루 셀 수가 없다.

이를테면 척재 김선생(惕齋金先生) 휘(諱) 만희(萬希)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벼슬은 고려조에 좌헌납(左獻納),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내고 위조(僞朝)⁵때에 물러나 은거(隱居)하였는데 신왕조(新王朝:조선조)에서도 좌정승(左政丞)으로 불렀으나 명을 거역하고 일어나지 않자, 제주(濟州) 애월현(涯月縣)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같이 유배되어 바다에 들어간 분으로는 대제학(大提學) 한천(韓蕆), 교리(校理) 이미(李美)이다.

 

척재선생은 유배되어 살며 자취를 감추고 이름을 만희(萬希)로 고치었으니 “그 죄가 만만(萬萬)하여 밝은 사리를 거울 삼아 하늘에 바랄 뿐이다.[萬萬有罪 希天監昭昭也]”는 뜻을 붙였다. 산수를 방랑(放浪)하며 시가(詩歌)를 읊조리고 곤궁해도 고민하지 않다가 마침내 세상을 마쳤으니 때는 영락(永樂) 갑신년(1404년)이었다. 자손이 그대로 제주(濟州)에 살아서 후손이 번성하여 어엿이 제주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을진댄 나는 그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⁶”하였는데 선생과 같은 분은 의를 취하였다고 할 만하다.

 

지난 을해년(1935년) 두문서원(杜門書院)을 다시 세울 때에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살펴보았더니, 성명을 특별히 쓴 분 72인이 있었고 성명이 전하지 않은 분으로 특별히 쓴 것이 2백여 인이 있었으며 태학생(太學生) 90여 인을 별도로 쓴 것이 있었다. 또 ⟪중경지(中京誌)⟫를 살펴 보았더니 또한 이러한 말이 실려 있었다. “나라의 운이 다하여 허둥지둥 할 즈음에 서쪽 지방으로 숨은 사람이 70인에 그치지 않고 동쪽지방으로 숨은 사람이 48인 뿐만이 아니다.” 또, 당시 제현(諸賢: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킨분)의 ⟪언지록(言志錄)⟫을 상고하여 곧 각가(各家 )의 보승(譜乘:족보와 가승임)에서 그 관직과 성명을 얻어 증거할 만한 분이 43위(位)였다. 원래 제향(祭享)하는 분 72인까지 아울러 모두 115위를 얻어 위패(位牌)를 세워 봉향(奉享)하였으나 그 나머지 누락된 분을 이루 셀 수 있겠는가. 척재선생 같은 분도 누락된 분 중의 한 분이니 어찌 ⟪태조실록⟫가운데 성명이 전하지 않은 분이 아님을 알겠는가. 서원을 다시 세운 일은 나도 참여하였으나, 지금 10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선생의 일을 들었다. 그 유문(遺文)과 시를 보니, 양해록(襄海錄) ⦁은감유성록(殷鑑幽省錄) 등 약간 편(篇)에서 당시 창황하고 비분(悲憤)하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두문서원의 제향(祭享)에 오르지 않은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삼가 선생을 위해 전(傳)을 세워 후세의 고증에 대비한다.

 

서재 갑신년(1944년) 11월 보름에

경학원 대제학(經學院大提學) 곡부(曲阜) 공성학(孔聖學) 지음

 

 

 

  註----------------------------------------------------------------------------------------------------------

 

1) 기자(箕子)가 … 미친 체한 것 : 기자는 주(紂)의 숙부. 주(紂)가 탐욕스럽고 방탄한 짓을 하므로 기자가 간하였더니 주는 듣지 않고 그를 가두었다. 어떤 사람이 “떠나갈 만하다” 하자, 기자는 “남의 신하가 되어 간함에 들어주지 않는다. 하여 떠나간다면 이것은 임금의 악행을 드러내고 스스로 백성들에게 기쁨을 받는 것이니 나는 차마 못하겠다.”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여 노예가 되었으며, 마침내 숨어서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슬퍼하였다. ⟪小學 稽古⟫⟪史記 宋微子世家⟫주1) 참조

 

2) 백이(伯夷)가 … 죽은것 : 백이는 은(殷)나라 충신. 주(周)가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나라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따먹다가 굶어죽었다. ⟪史記伯夷傳⟫시 주12) 참조

 

3) 매복(梅福) : 한(漢)나라 수춘(壽春) 사람. 자(字)는 자진(子晉) · ⟪상서(尙書)⟫⟪곡량춘추(穀梁春秋)⟫에 밝아 군(郡)의 문학(文學)이 되고 남창위(南昌尉)에 보임되었다. 뒤에 벼슬을 버리고 집에 살면서 독서하고 성정을 수양하였다. 성제(成帝)·애제(哀帝) 때에 자주 글을 올려 시사를 말하였다. 왕망(王莽)이 전정(專政)하자, 하루아침에 처자(妻子)를 버리고 구강(九江)을 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뒤에 매복은, 성명을 고치고 오(吳)지방 시문(市門)의 군사가 되었다 한다. ⟪漢書卷六十七⟫매복은 왕망(王莽)의 찬찰을 예견하고 은둔한 것이다.

 

4) 관녕(管寧) : 삼국(三國) 위(魏) 나라 사람. 자(字) 유안(幼安), 학문에 뜻을 독실히 하였다. 소시에 화흠(華歆)과 같은 자리에서 글을 읽었는데, 고관들의 행차가 집앞을 지나갔다. 화흠이 책을 덮어놓고 가서 구경하자, 관녕은 “내 친우가 아니다”하고 자리를 잘라 나누어 앉았다. 한(漢)나라 말기에 황건적(黃巾賊)의 난리가 일어나자 피란하여 요동(遼東)에 살았는데, 따르는 사람이 많아 달포 사이에 읍이 이루어졌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군에 돌아왔고 조정에서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三國志券十一 高士傳下⟫

 

5) 위조(僞朝) : ‘가짜 조정’ 이라는 뜻으로 고려의 우왕(禑王) · 창왕(昌王)때를 말한다. 우왕과 창왕은 왕씨(王氏) 혈통이 아닌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각각 폐위(廢位)되었다.

 

6) 맹자가 … 취하겠다 :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에 나온다.

 

 

左政丞金公諱萬希傳

 

경학원대제학 춘포 공성학

經學院大提學 春圃 孔聖學

 

사대부식군지록 이불행치정혁지제 능이정절자수자 고제사책 능득기인호 여기자

士大夫食君之祿 而不幸値鼎革之際 能以靖節自守者 考諸史冊 能得幾人乎 如箕子

 

지피발 백이지채미상의 하지매복관녕지류 거취수수 이기견확불굴지지 즉고소동

之披髮 伯荑之採嶶尙矣 下至梅福管寧之流 去就雖殊 而基堅確不屈之志 則固所同

 

야 당여계내손지일 여포은목은지고절 병연일성 조요천고 이두문제현 의수망복

也 當麗季內遜之日 如圃隱牧隱之高節 炳然日星 照耀千古 而杜門諸賢 義守罔僕

 

부식강상자 지불승루야 지여척재김선생휘만희 관여조좌헌납 첨의찬성사 삼중대

伕植綱常者 指不勝僂也 至如惕齋金先生諱萬希 官麗朝左獻納 僉議贊成事 三重大

 

광 도첨의좌정승 위조퇴은 신조이좌정승초지 항명불기 유찬우제주애월현 당시

匡 都僉議左政丞 僞朝退隱 新朝以左政丞招之 抗命不起 流竄于濟州涯月縣 當時

 

동폄입해자 대제학한천 교리이미야 척재선생 찬거회적 개명이우만만유죄 희천

同貶入海者 大提學韓蕆 校理李美也 惕齋先生 竄居晦跡 改名以寓萬萬有罪 希天

 

감소지의 방랑산수 기오시가 액궁불민 경이몰세시즉영락갑신야 자손잉거어제주

監昭之義 放浪山水 寄傲詩歌 阨窮不憫 竟以沒世時則永樂甲申也 子孫仍居於濟州

 

운잉번연 엄위제주지거족야 추성왈 생역아소욕 의역아소욕 이자구불가득 오기

雲仍繁衍 儼爲濟州之巨族也 鄒聖曰 生亦我所欲 義亦我所欲 二者俱不可得 吾基

 

사생이취의자야 여선생 가위추의자야 왕재을해 부설두문서원 시 안 태조실록즉

捨生而取義者也 如先生 可謂取義者也 往在乙亥 復設杜門書院 時 按 太祖實錄則

 

유특서 성명자칠십이인 유특서부전성명자이백여인 유별서태학생구십여인 우안

有特書 姓名者七十二人 有特書不傳姓名者二百餘人 有別書太學生九十餘人 又按

 

중경지 역유왈운흘창황지제 서돈부지칠십인 동장 비특사십팔인 우고당시제현언

中京誌 亦有曰運訖蒼黃之際 西遯不止七十人 東藏 非特四十八人 又考當時諸賢言

 

지록 내각가보승 득기관직씨명 족가거자사십삼위 병원향칠십이위 공득일백십오

志錄 乃各家譜乘 得其官職氏名 足可據者四十三位 並原享七十二位 共得一百十五

 

위 입패봉향 이기여유낙루자 가승수재 여척재선생역누고지일 이안지비실록중

位 立牌奉享 而其餘流落漏者 可勝數哉 如惕齋先生亦漏考之一 而安知非實錄中

 

부전성명자재 복원지사 여역참간 이금재십년지후 시문선생지사 견기유문여시여

不傳姓名者哉 復院之事 余亦參幹 而今在十年之後 始聞先生之事 見其遺文與詩如

 

양해록 은감유성록등 약간편 족이규당시창황비분지적 이이부제어두문지향 위지

襄海錄 殷鑑幽省錄等 若干篇 足以竅當時蒼黃悲憤之跡 而以不躋於杜門之享 爲之

 

심석 고근위선생입전 이비후세지고증운이

甚惜 故謹爲先生立傳 以備後世之考證云爾

 

세재 갑신양복월지망 경학원대제학 곡부공성학찬

歲在 甲申陽復月之望 經學院大提學 曲阜孔聖學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