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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먼 옛날 한강(漢江) 북쪽에 단군 고조선(檀君 古朝鮮)이 건국한 이래 부여(扶餘), 옥저(沃沮), 동예(東濊) 등의 부족국가가 생겨나고 평양을 중심으로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한강 남쪽으로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성립되어 삼한(三韓) 시대가 계속되었다.

B.C. 193년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난세를 피하여 들어와서 준왕(準王)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니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B.C. 108년 한무제(漢武帝)는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萄), 진번(眞蕃)의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한족(漢族)을 몰아내기 위하여 B.C. 57년에는 경주(慶州)를 중심으로 육촌장(六村長)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新羅)를 건국하고 B.C. 37년에는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중심으로 고주몽(高朱蒙)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B.C. 18년에는 위례성(慰禮城)을 중심으로 고온조(高溫祚)를 왕으로 추대하여 백제(百濟)를 건국하고, AD. 42년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구간(九干)이 김수로(金首露)를 왕으로 추대하여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하였다.

 

2. 가락국의 건국

옛 변한(弁韓) 지역은 낙동강 하류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농산물이 풍부하므로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등 부족장들이 공동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건국하면서 이 지역을 침범하므로 이를 막아내기 위하여 이들에게도 통솔자 왕이 필요하였다. 이들 구간(九干)들은 서기 42년 3월 3일에 9간과 백성들이 시냇가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임금을 점지해 주십시오”하고 의식을 거행하던 중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었다. 이들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위를 쳐다보니 상공에서 자주빛 밧줄에 금합(金盒)이 매달려 내려왔다.

구간들이 달려가 금합을 열고 보니 황금빛 번쩍이는 알 여섯이 들어 있었다. 구간들은 “하늘이 필시 우리에게 내린것 이라”하여 구간의 우두머리 아도간(我刀干)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다음 날 다시 열고 보니, 여섯의 금알은 늠름하고 준수한 동자(童子)로 화신하여 있었다.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동자의 이름을 머리수(首)자를 써서 수로(首露)라 하고, 본 시 금합(金盒)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金)’으로 하여 구간들이 서기 42년 3월 15일에 왕으로 추대하여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하였다.

 

나머지 다섯 동자에게도 차례로 영토를 정하여 아나가야(阿那伽椰:阿羅伽揶:咸安), 고령가야(古寧伽倻:咸昌), 대가야(大伽倻:高靈), 벽진가야(碧珍伽倻:星山伽揶:星州), 소가야(小伽揶:固城)에 봉하고 서울을 김해(金海)로 삼았다.

 

3. 허왕후(許王后) 도래(渡來)

가락기원 7년(서기 48년) 7월 27일에 9간들이 대왕을 뵙고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시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로 삼으소서”하였다.

왕은 “짐이 이곳에서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거니와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인즉 경들은 염려마시오” 하였다.

어느날 대왕은 유천간(留天干)에 명하여 작은 배와 말을 끌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망을 보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승점(乘岾)으로 나아가 기다리도록 하였다. 때마침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 위에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검붉은 빛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망산도의 유천간이 곧 횃불로 신호를 올리자 그 배는 미끄러지듯 내달아와 지금의 진해시 용원 앞바다에 있는 부인당(夫人塘)으로 들어와 정박하였다. 그 일행 중에는 공주(公主)한 분과 시종(侍從) 20인이 타고 있었다. 신귀간이 승점에서 이 광경을 보고 곧바로 대궐로 달려가 대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급히 9간들을 보내어 대궐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9간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공주께서 엄숙히 말하기를 “나와 그대들은 초면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 가리오” 하였다.

유천간이 돌아와 공주의 말씀을 아뢰니 대왕께서도 옳게 여기시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십리쯤 되는 산기슭에 만전(幔殿: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거처)을 치고 몸소 영접을 하게 되었다.

공주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지금의 능현(綾峴))에서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山神)에게 예물로 바쳤다. 공주를 시종해 온 신하와 노비는 20여명이고 또한 공주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금 ⦁ 은 ⦁주옥의 패물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공주가 점차 대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대왕께서는 유사에게 명하여 시종내외에게는 방 하나씩을 주게 하고, 노비들에게는 한방에 5,6명씩 들어가게 하였다.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해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감도는 자리에서 자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군졸들로 하여금 보호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왕과 공주는 침전에 드시니 비로소 공주는 조용히 말하기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 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거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배를 타고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를 가지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3천년만에 한번씩 열린다는 복숭아)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하였다.

대왕 응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에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하였다.

대왕과 공주는 혼례를 올리고 함께 두 밤을 지낸 후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는 왕후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며 15명의 뱃사공에게 각각 쌀 10석과 비단 30필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했다. 8월 1일 대왕과 왕후는 신하를 좌우에 거느리고 수레를 타고 본궁으로 돌아와 두 분이 힘을 합아여 정사(政事)를 펴게 됐다.

 

4. 수로왕의 덕정(德政)

6가야의 영토는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현 낙동강),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였다.

즉위 2년 봄 정월에 대왕은 서울을 정하기 위하여 가궁(假宮)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으로 나갔다. 사방으로 산악들을 바라보시고 나서 신하들에게 분부하기를 “이곳은 여뀌 잎사귀처럼 협소하지만 지세는 수려하게 빼어나서 가히 16나한(羅漢:석가의 16제자로 학문과 덕행이 높았음)이 살만한 곳이다. 더욱이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그 셋에서 일곱을 이루었던 칠성(인간의 길 ․ 흉 ․ 화 ․ 복을 주관하는 칠성여래)이 살 곳으로도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해서 좋은 고장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소”하였다.

이곳에 1천5백보 둘레의 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와 곡식창고를 지을 터를 정하신 뒤 환궁하였다. 그해 정월 20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즉위 3년 2월에 낙성하였다. 성(城)은 흙을 쪄서 쌓았으며 지금의 김해읍 서쪽 봉황동(鳳凰洞)에 궁궐 유적이 남아 있다. 대왕께서는 길일을 택해 새 궁전으로 옮기어 온갖 정사를 다스리고 모든 일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때 완하국(琓夏國)이란 나라의 함달왕(含達王)의 왕비가 임신하여 낳은 알에서 깨어나온 탈해(脫海)가 문득 바닷길을 따라 가락국에 당도했다. 그는 키가 3척에다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탈해는 서슴지 않고 대궐로 나아가 대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이다.”라고 했다.

 

대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함인즉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으며 또한 나라와 백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고 하였다.

탈해가 제의하기를  “그렇다면 서로의 재간으로 승부를 내봅시다.”하니 대왕은 쾌히 응낙하였다.

삽시간에 탈해는 매로 변하니 대왕은 독수리로 변하였다. 탈해는 또 참새로 변하니 대왕은 새매로 변하였는데 그 시간이 민첩했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대왕도 역시 본신으로 돌아왔다. 이에 탈해는 마침내 엎드려 항복하여 말하기를 “제가 술법을 겨룸에 있어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죽임을 면하게 된 것은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왕과 더불에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리석은 일인가 합니다. ” 하였다.

 

탈해는 대왕에게 인사를 드린 후 밖으로 나와 그 부근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의 배들이 다니는 바닷길을 따라 가려고 했다. 대왕은 그가 체류하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급히 수군 5백척을 보내서 그를 쫓게하였으나 탈해가 신라의 땅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되돌아 왔다.

대왕은 구간(九干)의 이름을 바꾸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여도(汝刀)는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는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는 오상(五常)으로 고치시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글자는 그냥 두고 아랫자만 고쳐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하였다. 신도(神刀)는 신도(神道)로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치고 신귀(神鬼)는 음은 본래대로두고 그 훈만 고쳐서 신귀(臣貴)라 하셨다. 그리고 신라의 직제를 취하여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사간(沙干)등의 품계(品階)를 두고 그 밑에 관리는 주(周)나라의 규례(規例)와 한(漢)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배정했다. 이것은 곧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며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 제도를 정하니 질서가 잡히게 되었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아니하여도 위엄이 서고 그 정사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5. 대왕과 왕후 승하와 두 왕자 허씨로 사성(賜姓)

가락 기원 148년(189년) 3월 1일 왕후가 붕어하니 향년 157세였다. 온 나라 백성들은 그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으며 금관성(金官城) 서북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능의 이름을 후능(后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대왕은 왕후가 서거하신 뒤 매양 외로움을 달래며 슬퍼하시다가 왕후가 돌아가신지 10년 후인 가락기원 158년(199년) 3월 23일에 승하하시니 재왕위 121년 재태왕위(在太王位) 38년 수(壽) 158년이셨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여윈 듯, 왕후가 서거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백보 되는 빈궁(殯宮)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납릉(納陵)이라 하였다

아드님 도왕(道王 : 諱居登)에서부터 9대손 양왕에 이르기까지 제향을 올렸는데 반드시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청결한 제물을 차려 제를 올리는 일을 끊이지 않았다(현재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대제를 봉행한다.)

 

고보왕세계(古譜王世系)에 의하면 허왕후(許王后)는 10남 2녀를 낳으셨는데 맏아드님은 제2대 임금 도왕이며 차남은 거칠군(居漆君)으로서 3남과 같이 허씨(許氏)로 사성(賜姓)되었고 나머지 7왕자는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가야사에 들어가 도교(道敎)․불교(佛敎)․선도(仙道)를 배우고 익히어 모두 성불(成佛)하여 칠불사(七佛寺)에 병향(並享)되었다.

이로써 가락국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보다 320여년 앞서 들어온 것이다.

장녀 영안공주(永安公主)는 태사(太師) 배열문(裵烈文)에게 하가(下嫁)하였고, 둘째 공주는 신라 석태자비(昔太子妃)가 되었다.

 

6. 가락국의 발전

가락국의 건국 이래 10세(世)에 걸쳐 491년간 사직(社稙)을 보존하였고 강토를 지켜왔으니 그 경계를 살펴보면 수도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黃山․신라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 남쪽으로는 남해였으니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이 가락국 영토였다.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건국 이래 4세기 말까지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물물교역이 성행하여 민생이 안정되니 민호는 1만여호에 인구는 7만5천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국토의 경계로는 동쪽은 황산강(黃山江)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서쪽은 지리산으로 백제와 경계하고, 북은 함창(咸昌) 북쪽을 경계로 신라 ․ 백제와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에 임하여 금석병용(金石倂用)의 문화를 가진 나라로 발전하였다. 근간에 이 지역 고분에서 발굴되는 철제 무기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첫째 낙동강 하류 비옥한 땅에 농산물이 풍부하고, 둘째 이 지역에서 철이 생산되어 무기와 농기구를 제작할 수 있었고, 셋째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한(漢)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운 까닭이다. 그러므로 일본인의 왕래도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가락국이 신라 ․ 고구려 ․ 백제와 더불어 정립(定立)하였으므로 일부 사가(史家)에서는 이를 사국시대(四國時代)라고 한다.

 

7. 가락국의 쇠망

신라 ․ 고구려 ․ 백제는 각기 국토확장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신라 지증왕(智證王)은 서기 506년 숙왕(肅王: 諱鉗知)때 소가야(小伽倻:固城)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락국은 국력이 쇠하여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法興王)은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국력 신장에 힘써 서기 516년에 가락국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를 방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서기 521년에 숙왕이 돌아가시고 양왕(讓王:諱 仇衡)이 즉위하였다. 이 때 대가야(大伽倻:高靈)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양국 왕실간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내와서 혼인하게 하였다.

법흥왕이 서기 524년에 밀양 영산 지역을 침공하여 병합하자, 서기 531년에는 백제가 함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백제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기 532년 군대를 휘동(麾動)하여 가락국으로 진격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 양왕은 앞뒤로 신라와 백제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 끝에 사직(社稷)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백성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하여 세 왕자와 함께 법흥왕에게 나라의 주권을 의탁하였다. 법흥왕은 이를 가납(嘉納)라여 이들을 상빈(上賓)으로 우대하고, 왕자 무력(武力)으로 하여금 신주대총관(新州大摠管)에 임명하여 가락 유민들을 돌보게 하였다.

이로써 가락국은 수로왕(首露王)건국 이래 10왕에 역년 491년으로 끝을 맺었다. 혹자는 무력(武力)이 신주대초관으로서 여전히 백성을 다스렸다 하여 ‘무력왕(武力王)’이라 하고 서기 535년에 사임할 때까지를 합하여 11왕에 역년 521년이라 하기도 한다.

 

그 후 가락 왕족 무력(武力)의 아들 서현(舒玄)은 신라왕실 숙흘종(肅訖宗:진흥왕의 동생)의 딸 만명(萬明)과 결혼하여 유신(庾信)을 낳았고, 딸 문희(文姬)는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와 결혼하여 문무왕(文武王)을 낳았다. 그리하여 유신(庾信)은 신라의 삼국통일의 주역(主役)으로 활약하여 특별히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오르고 흥무왕(興武王)이라 시호(諡號)되었다.

 

8. 국호(國號)의 고찰(考察)

가락국의 국호와 명칭은 역사상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락(駕洛), 가야(伽倻), 가라(伽羅), 금관국(金官國) 등 여러 가지로 불리었고 문헌비고여지고(文獻備考與地顧)에는 임라(任羅)라 기술한 것도 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도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記), 고사기(古事記), 만엽집(萬葉集)등에도 가라(加羅), 가락(駕洛), 임나(任羅), 미마나임나(彌摩那任那), 금관국(金官國)이라고 쓰여 있다.

사가(史家)들은 모두 가라(加羅) 혹은 가야(伽倻)의 사음(寫音)으로 보고 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지은 강역고(彊域考)에 의하면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락의 영토가 낙동강을 소가 멍에 메듯 메고 있는 형상이어서 ‘가락’이라 이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9. 가락연표

서기

가락국

중요사항

신라

고구려

백제

 

태수로왕

3월 15일 구간(九干)의 추대로 가락국을 건국 왕이됨.

19

25

15

42

1

5개 가야국 판도를 정하여 가락국은 육가야의 연합국이 됨.

 

민중왕

 

44

3

궁성을 작성함. 지난 해 10월에 착공 2월에 준공함.

21

1

17

 

 

 

모본왕

 

48

7

7월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도래하여 왕후로 삼음.

25

1

21

 

 

탈해왕

태조왕

기루왕

78

37

8월 신라군과 황산진(黃山津)싸움에서 승리함.

22

26

2

96

55

9월에 신라의 마두성(馬頭城)을 공격하여 성주 장세(長世)를

파사왕

 

 

 

 

죽이니 신라왕 파사(婆娑)가 친히 공격하여 오므로 후퇴함.

17

43

19

97

56

신라와 휴전 화약함.

18

44

20

102

61

태자단(太子壇)을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함

23

50

26

106

65

신라가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락국을 침범하였으모 이를

27

54

30

 

 

격퇴함.

 

 

 

115

74

7월에 신라군이 황산하(黃山河)를 건너 침범하므로 가락국이

지마왕

 

 

 

 

복병하였다가 이들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신라왕이

4

63

39

 

 

포위망을 뚫고 물러갔다.

 

 

 

116

75

8월에 신라군이 1만기병으로 가락국을 침범하니 가락국이

5

64

40

 

 

영성(嬰城)에서 이를 막았다. 또 비가 오래 계속 되므로

 

 

 

 

 

신라군이 불리하여 물러갔다.

 

 

 

162

121

태자 거등(居登)에게 섭정(攝政)하게 하고 수로왕과 허왕후는

아달왕

차대왕

개루왕

 

 

태왕궁에 거처하니 옛 마한 변한 54개 부족 유민들이

8

6

13

 

 

모두 와서 하례하였다.

 

 

 

189

148

3월 1일 허왕후가 돌아가셨다. 향수 157세로 궁성 서북쪽에

벌휴왕

고국천왕

초고왕

 

 

장사하고 보주태후능(普州太后陵)이라 하였다.

6

11

24

 

 

10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셋째 왕자는 모성 허씨를 사(賜)

 

 

 

 

 

하여 뒤를 잇게 하였다.

  

 

 

 

도왕

수로왕이 태자 거등(居登)이 등극하니 도왕(道王)이다.

 

 

 

199

1

왕비는 경선왕후(敬善王后)로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4

3

1

 

 

딸이다.

 

 

  

200

2

2월에 신라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5

4

35

209

10

7월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침임하였으므로 왕자를

14

13

44

 

 

신라에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니 신라의 태주 석우로(昔于老)

 

 

 

 

 

와 이음(利音)이 와서 물리쳤으므로 포로가 되었던 6천명의

 

 

 

 

 

가락군이 돌아왔다.

 

 

 

212

13

신라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었다.

17

16

47

231

32

7월에 신라의 석우로(昔于老)와 연합하여 감문국(甘文國

조분왕

동천왕

구수왕

:경북 금릉군)을 정벌하였다.

2

5

18

249

50

왜구가 시라에 침입하여 왕자 우로(于老:나물왕의 왕자)

점해왕

중천왕

고이왕

를 죽였다 하므로 가락국ㄴ이 출젆아ㅕ 왜구 2백급을

3

2

16

참하였다.

253

54

9월 17일 도왕(道王)이 승하하였다. 섭정 37년, 재위54년

7

6

20

무릇 91년간 국정을 보살폈다. 서야록(西野麓)에

장례하였다.

유리앙

봉상왕

책계왕

292

39

1월 29일 성왕(成王)이 승하하였다. 재위 38년이다.

9

1

7

덕왕

성왕의 세자 거질미(居叱彌)가 등극하니 덕왕(德王)이다.

유리왕

봉상왕

책계왕

292

1

왕비는 덕희왕후(德禧王后)로 아간(阿干) 아궁(阿躬)의

9

1

7

손녀이다.

297

6

이서고국(伊西古國:경북 청도군)이 신라의 서울을

14

6

12

침공하였으므로 가락군을 파견하여 토멸하였다.

312

21

왜(倭)에서 청혼(請婚)하여 왔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홀해왕

미천왕

비루왕

 

 

신라에 청하니 신라왕은 아찬(阿湌) 급리(急利)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346

55

7월 8일 덕왕(德王)이 승하하니 재위 55년이다. 덕왕의 세자

고국원왕

근초고왕

이시품(伊尸品)이 등극하니 사농경(司農傾) 극충(克忠)의

37

16

1

딸이다.

명왕

4월 10일에 승하하니 재위 61년이다. 능은 김해능동

실성왕

광개토왕

지왕

407

62

(金海陵洞)에 있다. 명왕의 세자 좌지(坐知)가 등극하니

6

17

3

신왕(神王)이다. 왕비는 자혜왕후(慈惠王后)로 대아간

(大阿干) 도녕(道寧)의 딸이다.

신왕

왜(倭)가 대마도(對馬島)에 영(營)을 설치하였다. 대마도는

7

18

4

408

2

본래 가락국의 속령이었는데 이때 왜가 군인을 상주시키니

 

 

 

신리와 함께 크게 우려하였다. 왕은 용녀(傭女)를 총애하여

 

 

 

여당(女黨)으로써 벼슬을 시키니 국내가 어지러워졌다.

 

 

 

신라가 이틈을 이용하여 침공하려하니 충신 박원도(朴元道)가

 

 

 

이를 간하였다. 또 복사(卜士)가 점을 치어 괘(卦)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발 밑에 아첨하는 무리를 끊으면 어진 신하가

 

 

 

저절로 도울 것이다." 하였다. 신왕이 옳게 여기어 용녀를

 

 

 

 

 

귀양 보내고 행실을 바로하니 나라의 정치가 바로섰다.

 

 

 

421

15

5월 12일에 신왕이 승하하니 재위 14년이다. 신왕의 세자

늘지왕

장수왕

구이신왕

취희(吹希)가 등극하니 혜왕(惠王)이다. 왕비는 소자왕후

5

9

2

(昭慈王后)로 각간(角干)진사(進思)의 딸이다.

혜왕

비유왕

433

13

백제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17

21

7

444

23

왜구(倭寇)가 침범하니 거칠성(居漆城:동래성)에서

28

32

18

격퇴하였다.

451

31

2월 3일 혜왕이 승하하니 재위 30년이다. 혜왕이 세자질지

35

39

25

 

 

(銍知) 등극하니 장왕(莊王)이다. 왕비는 안정왕후

(安定王后)로 사간(沙干) 금상(金相)의 딸이다.

장왕

장유산(長遊山)에 왕후사(王后寺)를 지어 전(田) 10결을

36

40

26

452

2

하사하여 공양미로 삼게하고 불교를 장려하였다.

463

13

왜구가 황산강(黃山江)을 올라와서 침범하니 군대를 보내어

자비왕

개로왕

소탕하였다.

6

51

9

479

29

가락국이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니 남제 고제(高帝)가

소지왕

동성왕

가락왕에게 보군장군(輔國將軍)직을 주었다.

1

67

1

481

31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침범하여 신라의 호명성(狐鳴城

3

69

3

:강원도 금화군)등 7성을 점령하고 미질부성(彌秩夫城

:경북 영일군)까지 진출하니 신라왕의 요청으로 신라, 백제,

가락삼국이 연합하여 이하(泥河):강원도 정선군)에서 격퇴

하여 천여급을 참하였다.

492

42

10월 4일 장왕이 승하하니 재위 41년이다. 세자 겸지(鎌知)가

문자왕

등극하니 숙왕(肅王)이다. 왕비는 효인왕후(孝仁王后)로

14

1

14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이다.

숙왕

신라의 지증왕(智證王)이 소가야(小伽倻:固城)를 공격하여

지증왕

무령왕

506

14

왔는데 숙왕은 국력을 통합하지 못하고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7

12

6

516

24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가락국을 침범하니 방어력이 모자라

법흥왕

어려움이 많았다.

3

35

16

521

29

4월 7일 숙왕이 승하하니 재위 29년이다. 거칠국(居漆國:동래)

안장왕

내산(內山)에 장례하였다. 숙왕의 세자 구형(仇衡)이 등극하니

8

3

21

양왕(讓王)이다. 왕비는 계화왕후(桂花王后)로 분수(分水)

이질(爾叱)의 딸이다.

양왕

3월에 대가야(大伽倻:고령)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청혼하니

성왕

523

2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허락하였다.

10

5

1

531

10

겨울에 연자루(燕子樓)가 우니 장안 백성이 경동(驚動)하므로

 

안원왕

 

왕이 헐도록 명하였다. 구전하기를 연자루가 울면 나라가

18

1

9

망한다는 말이 있기 까닭이다.

532

11

신라 법흥왕이 김해로 진군하니 양왕이 국권을 법흥왕에게

19

2

10

의탁하였다. 이로써 가락국은 10왕에 역년 491년으로 끝을

 

 

 

맺었다.

 

 

 

양왕은 서기 557년에 승하하시니 향수 69세이다. 지품

 

 

 

천현(知品川縣)에 장례하니 오늘의 산청군 양왕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