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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가락 500년 가락의 향기, 역사의 빛되어

발행처 : 가락중앙청년회

 

12사우     /     4전(릉) 12사우 제향일

 

1. 은월사隱月祠

 

각간 김무력(金武力)과 각간 김서현(金舒玄)은 신라의 간성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세보에 따르면 무덤이 울산 은월봉 동쪽 태화강 아래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지금 사당 둘레에는 큰 무덤 4,5기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김장군의 묘'라고 하고 있으나 어느 것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806년 윤4월에 사당을 지어 오랫동안 제사를 받들어 모시어오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철거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그뒤 제향을 모시지 못하다가 후손들이 간절히 소망하고 유림들이 협조하여 다시 제단을 만들고 제향을 모시다가 1989년 성금을 모아 은월사를 중건 복원하고 제단을 사당 뜰에 지었다.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3동 479번지에 있다. 각간 김무력과 각간 김서현 장군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9월20일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

 

은월사

 

무력, 서현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울산 은월사 경내 사적비와 기적비

 

2. 취서사鷲棲祠(취산재)

 

각간 김무력과 각간 김서현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 사당이다.

 

1986년에 시작하여 1993년에 창건하였다. 병인년(1686)에 발간한 족보에 따르면 각간 김무력이 교산성과 유산성을 빼앗고 칠포, 감문, 초팔국 등이 와서 항복했으나 애석하게도 공께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신라에서는 취서산 일대 땅을 내리고 취선사를 지어서 능침을 지켰다고 한다. 이 취선사 가까운 자리에 취서사라는 사우를 세웠다. 이곳은 각간 김서현과 만명부인 김씨의 초상화를 모신 존영각도 건립하였다.

 

각간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능침은 양산에 부부총으로 모시고 있다. 1960년 사라호

태풍으로 존영각이 떠내려가고 영정은 어느 무속인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영정을 양산 종친회에서 회수하여 춘추원에 기적비를 세우고 양산 유림과 공동으로 모시다가 1993년 취서사 창건과 동시에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이 존영은 2001년 5월 3일 경상남도 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취서사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07번지에 있으며, 제향일은 해마다 음력 3월 21일, 9월 23일이다. 취서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콘크리트형 목조건물이다.

 

취서사(좌), 영정각(우)

 

취산재

 

3. 서악서원西岳書院

 

1631년(효종2) 지방 유림이 뜻을 모아 개국공 김유신, 홍유후 설총, 문창후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경주부윤 이정이 김유신 위패를 모시는 서악정사西岳精舍를 창건하였다. 당시 경주에 사는 유림들이 최치원과 설총 위패도 함께 모실 것을 건의하자 퇴계 이황선생과 의논하여 두 분 위패도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서악정사라는 이름과 현판 글씨도 이황 선생이 짓고 쓰셨다고 한다.

이 서악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02년에 신주 모시는 사당을 새로 짓고, 1610년 강당과 재사를 중건하였다. 1623년에는 서악西岳이란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 때 내린 서원철폐령에도 부수거나 없애지 못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1873년에 중수하여 경북 기념물 제19호로 정해졌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615번지에 있으며, 제향일은 해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10)과 8월 중정일이다.

 

조선시대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에서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김유신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 위패를 모신 경주 서악정사가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을 때다.

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선비가 설총은 중국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이,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이 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한 무장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이 없다며 먼저 김유신 위패를 서원 제사에서 뺀 다음에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비가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 입은 무사들이 선비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히고는 사방에 무기를 들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벌여 선 가운데 김유신이 나타났다.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과 효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충이요.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효이거늘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말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데 깨보니 꿈이었다. 깨어난 선비는 두려워하며 앓아누웠다가 이틀 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

 

서악서원은 외삼문(도동문) 지금 현판 글씨는 사액 당시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가 쓴것이다.

 

영귀루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좌우에 판벽을 드리우고 트인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예전에는 이 영귀루가 누문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앞쪽에 외삼문(평삼문)으로서 도동문이 서있다. 옆에 서원을 처음 건립한 부윤 이정의 비가 서있다.

 

동재(절차헌)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다. 강당인 시습당에서 영귀루 쪽을 향할 때 차례로 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으로 짜여있다.

 

시습당

서악서원 시습당 강당이다. 시습時習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첫머리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呼’에서 따온 것이다. 집채 앞쪽에 칸살을 달아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집이다. 중앙 3칸은 우물마루이고 양쪽은 각 1칸짜리 온돌방이다. 왼쪽 방은 진수재, 오른쪽 방은 성경재라 쓴 편액을 달았다.

대청에는 다섯 개 현액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만력 경술(1610년) 가을 문소후인 김득질이 찬한다萬曆庚戌秋聞韶後人金得秩撰’라 적은 것으로 서악서원을 중수할 때 상량문, 나머지는 중수기이다.

연대 순서대로 ‘상지 10년 계유(1873년) 가을 8월 상한에 부윤 이만운이 찬한다上之十年癸酉秩八月上澣府尹李晩運撰’,

'승정 지원후5 임오(1882년) 6월 하완에 여강 이능정이 기록하다. 崇禎紀元後五壬午流月下浣驪江李能政記’,

'상지 29년 임진(1892년) 12월에 부윤인 원장 민연수가 찬한다. 上之二十九年壬辰十二月日府尹院長閔泳壽撰’,

그리고 1923년 이후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입추절 하완 통사랑 권지능문완부정자 월성 최현필이 기록하다.

立秋節下浣通仕郞權知承文浣副正字月城崔鉉弼記’라고 적은 기록들로 사악서원 중수시기를 알수 있다.

 

사우祠宇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하나인 제향을 위한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사악서원

 

영귀루

  

사악서원 경주부윤비

 

4. 남악서원南岳書院

 

흥무대왕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략상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 금산 아래에서 진을 치고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 꿈에 신령이 나타나 통일대업을 위한 가르침을 주시니 그 가르침으로 큰 공을 세웠고 이를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경남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있다.

 

1919년 이 지방 유림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경주 서악서원 이름을 본 따 남원서원이라 하였다. 정면3칸, 측면1칸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이다. 사당 앞에는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 강당이 있다. 이 강당은 대청이 없는 대신에 전면 툇마루를 길게 빼어 대청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서원 뒤쪽에는 남악사南岳詞가 있어 흥무대왕 김유신과 홍유후 설총, 문창후 최치원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仲丁日=한가위) 때 향사를 모신다.

 

남악사

 

남악서원

 

남악서원 전경

 

5. 길상사吉祥詞

 

835년(신라 흥덕왕10)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김유신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에 있으며 춘추제향을 받든다. 태령산은 친천읍상제리 북쪽에 있는 산으로 김유신 장군의 태를 모신 곳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이다. 길상사는 신라 때부터 전해오던 사당으로 고려 때 까지는 국가에서 제사를 모셔오다가 조선 태종 때부터 지방관이 주관하여 봉향하였다.

 

그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1851년 백곡면 가죽동에 죽계사를 재건하고, 1922년 도당산 안에 다시 세웠다. 1957년 흥무대왕신성비를 세우고,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으로 길상사를 중건하여 도지정 문화재 제1호로 정했다.

 

장우성 화가가 그린 가로 98cⅿ 세로 187cm 흥무대왕 김유신장군의 표준영정을 모셨다. 입구에는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을 비롯한 관리사, 내삼문, 협문2동 등 총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들어가는 들머리에는 옛날 관리사(제기고)인 모운당(慕雲堂)이 있다. 흥무전은 정면5칸, 측면2칸 규모 팔작지붕으로 벽면과 기단 등을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목조건물이다.

 

바깥뜰에는 흥무대왕신성비가 안뜰에는 김유신장군사적비 그리고 입구에는 길상사중건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번지에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 2월 보름과 8월 중정일(한가위)이다.

 

길상사 흥무전

 

길상사 입구 홍살문

 

길상사 출입문

 

6. 장렬사 壯烈詞

 

광주광역시 북구 도암동에 있다.

 

흥무대왕을 모신 장렬사는 1854년(철종5) 전남북 여러 고을에 있는 유림들이 창건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5) 부수어 없앴던 것을 1906년 다시 지금 있는 자리에 복원했다.

 

전라남도는 이 사우를 지정문화재 이외에 문화재 제4호로 정했으나 부지가 545평에 불과하고 사우도 낡아서 1970년 종친회에서 중건사업을 시작하였다. 1977년과 1978년 본전(26평), 내삼문(5평), 진사청, 화랑원 등을 건축하고 1981년에 종친회 성금과 지원으로 중건하였다.

 

이때 함께 배향했던 김일손(金馹孫)과 김광립(金光立)의 위패는 두암사(斗巖詞)로 옮기고 흥무대왕만 배향하게 되었고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지었다. 그 뒤 정부보조금과 자체부담금으로 2002년 보수공사를 크게 벌렸으며 사우로서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 3월 20일과 9월 20일이다.

 

장렬사 화랑원

 

장렬사

 

장렬사 입구 순충문

 

흥무대왕묘정비

 

장렬사 공적비

 

7. 보령원保寧院(개암사開巖詞)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대장군 김유신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 부흥운동을 섬멸한 곳이 주류성으로 지금 보령원 자리이다.

 

보령원은 철종 임술년(1862)에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순충전 개암사라고 부르다가 1934년 보령원이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당시 나당연합군 장군 28명이 죽어서 묘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상서면 감교리(장태평) 장발들에는 장군총이 있다.

 

대장군 김유신과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주류성 싸움에서 이기고 축배를 들었던 우금암도 지금까지 그 이름이 이어져오고 있다.

 

읍지에는 순장전(純壯殿)이라 적혀있고 제가사설(諸家史說)에는 개암사(開巖詞)라고 적혀있던 것을 갑술년(1934)에 이르러 사림과 그 후손이 합의하여 보령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보령원 외삼문은 누각 형식으로 단청을 하여 우람하게 지었고 아래층 대문은 태극문양을 넣어 위엄을 보이고 있다. 내삼문인 삼정문을 들어가면 김유신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흥무대왕 김유신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 3월20일과 9월20일 이다.

 

개암사

 

보령원

 

보령원 흥무대왕 유적비

 

삼정문

 

8. 완산사完山詞

 

흥무대왕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완산사는 주로 전주시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1924년에 김 ‧ 허 양성이 화수회를 만들어 헌성금을 모아오다가 1933년에 회원들 뜻으로 완산사를 창건하여 흥무대왕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그 뒤 1975년 이래 종친회장들이 큰돈을 헌성하니 이를 계기로 종친들이 한 둘 성금을 모아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0년 9월에 사당, 전사각, 강수재, 묘정비각, 내외삼문, 관리사 등을 모두 지었다.

 

완산사 외삼문인 일원문(一元門)은 강암 송성용 선생이 쓴 글이다. 완산사 대문마다 그러져 있는 문장(紋章)은 ‘가락’을 풀어서 ㄱ ㅏ ㄹ ㅏ ㄱ 으로 적어 넣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관리사가 있고, 한 계단을 돋우어 위쪽에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강수재는 여산 권삽석 선생이 1995년 봄에 썼다. 안쪽으로 내삼문인 숭모문(崇慕門) 그리고 숭모문 옆에 김유신 장군 행적을 새겨 넣은 순충장열흥무대왕비(純忠壯烈興武大王碑)와 비각이 있다.

 

여기를 지나면 흥무대왕을 모시는 중심 전각인 정면3칸, 측면2칸 짜리 중심 전각인 흥무왕묘(興武王廟)가 나온다.

 

완산사에는 당대 명필 들이 쓴 현판 글씨를 만나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흥무대왕묘

 

완산사 영정각

 

완산사 전경

 

9. 부풍사扶風詞

 

1954년 김해김씨 종중에서 흥무대왕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우를 짓고 영정을 만들어 받들어 모셨다. 그 뒤 문민공 김일손(金馹孫) 충정공 김우항(金宇杭)이 위패를 모셨으며 1966년에 규모를 넓혔다.

 

문민공 김일손은 호가 탁영(濯纓)이며 조선 성종에서 연산군까지 교수, 문한, 삼사, 사관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질정관과 진하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정유, 주전 등과 교유하고, 특히 <소학집설小學輯設>을 보급시켜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성종실록> 편찬 때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싣고 이극돈(李克墩)의 나쁜 행실을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충정공 김우항은 호가 갑봉(甲峰) 또는 좌은(坐隱)이다. 숙종 때 문신으로 형조 ‧ 병조판서, 좌참찬, 우의정 등을 지냈다.

 

1722년 경종 때 김일경(金一鏡)의 사친추존론을 반대하다가 그해 신임사화 때 화를 입었다.

 

입구에 흥무왕김유신장군송제비(興武王金庾信將軍松堤碑) 비각이 있고, 재실로 쓰는 수선재(修善齋)가 있다.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3칸, 측면2칸으로 구성된 시멘트 기단 위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운 부풍사(扶風祠)가 나온다. 김유신 장군 김일손, 김우항 위패를 모시고 있는 주 건물이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산9-1번지에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3월 20일과 9월 20일이다.

 

부풍사

 

흥무왕 김유신 송제비

 

김종필 총리 송덕비(2013. 4. 29 부풍사 입구에 건립)

 

10. 금산사金山祠

 

흥무대왕 김유신, 홍유후 설총, 문창후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금산사는 1870년(고종7)에 유림과 김해김씨 가문이 함께 뜻을 모아 1871년 금미산 기슭에 세웠다.

 

흥무대왕릉이 있는 산 이름을 본따 금산사라 하였다. 그 뒤 1930년 김해김씨들이 헌성금을 모아 위토를 마련하고 재실과 강당을 건립하고 또 유림들도 헌성금을 모아 중수를 거듭해왔다.

 

사당은 정면 6.5m, 측면 3.75m 굴도리집으로 원주형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겹처마건물이다. 사당은 1912년 창건 이래 1935년과 1971년에 걸쳐 두 차례 중수를 거쳤다. 1982년에는 화성군의 배려로 사우 담장을 새로 쌓았고, 그뒤 화성군 유림과 김해김씨 노력으로 화성군 향토유적 제7호로 1986년 5월 20일 정해졌다.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창곡리 산14번지에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이다.

 

금산사 전경

 

금산사

 

금산사 위국문

 

금산사 용화제

 

11. 화부산사花浮山祠

 

화부산사는 산 이름을 따서 일명 화산사(花山祠), 흥무왕사(興武王祠)라고도 하며 흥무대왕 김유신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우이다. 흥무대왕 사적이 있는 곳으로는 오대산 주검소(鑄劍所)와 팔송정 퇴병처가 특히 유명하다. 이 지역은 말갈족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664년(문무왕 4)말갈족이 빈번히 신라 변경을 침범하자 김유신은 왕명을 받들어 화부산 아래에 진을 치고 주검소에서 칼을 만들었으며, 팔송정 들판에서 말을 달려 퇴병처(退兵處)에서 적을 격퇴하였다는 이야기가 내려져온다. 그 뒤 주민들이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 화부산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세운 연대는 673년(문무왕13)으로 추정되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유신사 재화부산 화부산 재강릉북삼리(金庾信祠 在花浮山 花浮山 在江陵北三理)’라고 쓰여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합우성황사(今合于城隍祠)’라 하였다.

 

1884년(고종21)에 후손 김홍두 주선으로 중건되었다. 당시 강릉부사 김연수, 민영우께서 많은 협찬을 하였다고 한다. 1936년 영동선 철도가 부설되고 강릉역이 세워지면서 후손 김시배, 김현국이 주선하여 현 위치인 교동725번지로 이전하였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75호이다. 제향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날과 10월 22일이다.

 

화부산사

 

화부산사 전경

 

화부산사 중수사적비

 

화부산사 입구

 

12. 효령사孝靈祠 제동서원濟東書院

 

흥무대왕 김유신, 당나라 대총관 소정방, 연안후 이무를 모셨다.

 

백제를 정복한 뒤 세 장군은 경주로 가는 길에 삼정산 효령 장군봉에 올라 큰소리로 “이제 삼한 통합이 이룩될 것이니 백성들이여!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외쳤다한다.

 

그 뒤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 고려 때 하마비를 세우고 기원제를 지냈다고 한다. 사공씨(司空氏)라는 분이 이곳에 사당을 지어 제향을 받들 것을 상소하여 효령사를 세웠다고 한다.

 

1479년(성종9)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25권 군위현 사묘(祠廟)에 ‘김유신 사당은 효령현 서당에 있으며, 예부터 삼장군당이라 일컫는다. 해마다 단오일에는 현의수리(현감)가 고을 사람을 이끌고 역말을 타고 깃발을 휘날리고 북소리를 울리면서 신령을 맞이하여 마을에서 흥겹게 놀았다’고 하였다.

 

1862년 철종 때 사당에 불이 났는데 흥무대왕 위패는 하늘 높이 튀어 올라 나왔다고 한다. 1881년에 중건하였고, 1942년 중수하였다. 1946년 군위 고을 유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53년에 제동서원을 창건하여 3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옛터에는 효령사유지비(孝靈祠遺址碑)를 세웠다.

 

1992년 제동서원을 중수하였고, 1994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효령사를 복원하고 사적비도 세웠다.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 심리에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날이다.

 

효령사

 

제동서원

 

효령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