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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에 있어서 가문(家門)이 형성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김해김씨 가문의 성립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통일신라에 가락계로 등장하는 김해김씨 가문의 형성 배경과 특색을 더듬에 보겠다.

김해김씨 가문은 원래 가락국의 왕손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신라 법흥왕 19년(서기 532년)에 가락국왕 김구해(金仇亥)가 가락국을 신라에 병합하므로 신라조정은 이들을 예로 대우하여 상등(上等)의 위(位)를 주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 법흥왕과 진흥왕 때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 격화된 시기여서 신라로서는 가라국과 같은 배후 세력을 정복하여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으며 그 읍민들을 전쟁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가락 왕실이 비록 시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고는 하나 폐쇄적인 신라사회에 정치적 기반이 바로 확립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가락계 왕실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김무력(金武力)인데 그는 진흥왕 14년 군주각간(軍主角干)으로 임명되어 그가 무장으로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마침 진흥왕 15년인 서기 554년 김무력은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살해하고 백제군사 3만 중 2만 9천 5백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 관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세력 판도를 바꾼 결정적 전기가 됐고, 가락왕실계인 김해김씨 가문을 신라의 신흥귀족으로 등장시킨 계기가 됐다. 이후 무력의 지위는 상대등(신라의 최고 관직으로 화백회의 의장) 다음의 고관으로 승진되어 진흥왕 30년(569년)에는 최고위 관직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아직도 무력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이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와 혼인하려 했을 때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극력 반대했음이 김서현과 만명부인과의 혼인 설화(設話)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라 조정에서도 진흥왕이 재위 37년만에 승하하고, 당시 실권자였던 거칠부(居柒夫)의 힘을 빌어 차남이 즉위했는데 이가 25대 진지왕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거칠부가 사망하자 곧 폐위되고 왕위는 다시 장남인 진흥왕의 장손이 계승하니 이가 26대 진평왕이다. 그런데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 김용춘이요, 김용춘의 아들이 후에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이된 저 유명한 김춘추이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 속에 김해김씨(가락계 왕실) 가문은 꾸준히 중립을 지키며 계속 전공을 세워 군사권을 서서히 장악해 가면서 신귀족으로서의 가문을 형성해 갔다.

김서현은 만명과 혼인하여 당당한 신귀족 또는 왕족으로서의 가문을 격상 시키게 된다. 진평왕 51년(서기 629년) 김서현관 김용춘은 낭비성(娘臂城:지금의 청주)에서 고구려 대부대를 섬멸시켜 군사적 위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양가문의 친교 협력을 돈독히 했다.

김서현, 김용춘의 결속이 그들의 아들 김유신과 김춘추로 이어지면서 신라는 바야흐로 김유신, 김춘추시대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두 집안의 혼사(김유신장군 동생인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하여 문명왕후가 됨)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옹립되자 김유신계는 비로서 그 기반이 확고해졌으며 당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가락계 김유신가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金春秋)계의 심한 견제와 반대 속에 윤중(允中:김유신의 손자)을 대표로 하는 김유신계는 성덕왕 때 중앙정부에서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된다. 그 후 김유신계는 장청(長靑:김유신 증손자)이후 거의 쇠퇴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신라가 망하고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차츰 가락계 김씨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자, 중엽 이후 비로소 그 후손들은 본관은 그대로 두고 현달한 인물을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파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김해김씨가 단일 본관으로 가장 번성하나 파가 유달리 많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따라서 이 중시조들은 대개 고려 충신으로, 조선조에 벼슬길을 사양한 관계로 조선조에서도 김해김씨가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고려말 충신인 척재공 김만희(惕齋公 金萬希)도 조선조 중신(重臣)으로 기용하려고 부름 받았으나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恥事二君)”이라 하여 나가지 아니하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 귀향하면서 손자 휘 ‘예(禮, 一元 雲輔)’를 제주에 남겨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김만희를 중시조로 하여 약 4만2천여명의 ‘좌정승공파’의 가문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