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해 김씨 중에는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이 있는데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후손을 선김이라 하고, 경순왕(敬順王)후손인 김해 김씨와 일본인으로서 임진왜란때 귀화하여 김해 김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김충선(金忠善)계의 김해 김씨를 후김이라 한다.

경순왕계의 후김은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는데 김렴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김해를 관향으로 삼아 김해 김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 김시흥(金時興)이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과 명종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렴의 작위에 따라 김해김씨로 본관을 써 오다가 조선 헌종 15년 1849년 김시흥의 작위를 따라 대부분 금녕 김씨로 개칭했다. 그러나, 이들 후손 중에는 아직도 금녕 김씨로 개칭하지 않고 옛 김해김씨 족보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족보를 펼쳐김시흥을 중조로 삼은 것은 모두 금녕김씨로 보면 된다.

또, 임진왜란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휘하에서 왜병 선봉장으로 조선에 쳐들어온 사야가(沙也哥)는 상륙한지 1주일만에 경상 좌우병사 김응서(金應瑞:김해김씨양의공파조) 장군에게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 밟을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고 몰래 글을 보내와 귀순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장수가 된 그는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18개 왜성을 탈환했다. 이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그를 불러 김해 김씨의 성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들은 김해 김씨와 혼동을 피해 사성 김해 김씨(賜姓 金海 金氏)로 칭하면서도 호적과 족보에 김해 김씨로 올라 있는고로, 이들을 후김(後金)이라 한다. 왜란이 평정된 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사위가 되어 경상북도 우록(友鹿)골에 터를 잡아 세거(世居)하게 됐다.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은 대개 우록(友鹿)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나 아직도 김해김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후김(後金)으로 지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