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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재유고(惕齋遺稿)

 

척재(惕齋)는 입도조 휘(諱) 만희(萬希)의 호(號)이다.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이름을 바꾸었으니 그 죄가 만만하여 밝고 밝은 사리(事理)를 거울 삼아 하늘에 바랄 뿐이다.(不臣改名 萬萬有罪 希天籃昭昭也)”의 뜻으로 이름을 ‘만희(萬希)’라 하였고, 스스로 면려(勉勵)하고자 호(號)를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 하고,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산다”는 뜻으로 ‘척재(惕齋)’라 하였다.

 

이 유고(遺稿)는 1910년경부터 18세손 진사(進士) 병윤(炳胤)이 제족 가승(家乘) 등에 산재(散在)된 것을 탐심(探尋)하여 정리하다가 타계(他界)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20년경부터 19세손 대흥(大興)이 이어 받아 집성(集成)하였는데 그 영윤(令胤) 규형(珪瀅)이 1970년 경술보(庚戌譜)를 닦으면서 수편부록(首編附錄)으로 간행(刊行)하였다. 그러나 모두 한문으로 적었으므로 쉽게 읽을 수가 없어서 사학(斯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이정섭(李廷燮) 선생에 의뢰하여 국역하였다.

 

내용에 시록(辭錄) 3편 중 양해원사록(襄海原辭錄)은 태조 2년(1393년)에 유배와서 3년 후인 태조 5년(1396년)에 지으신 것이고, 은감유성록(殷鑑幽省錄)은 그후에 되돌아 보면서 적은 것이다. 맥서여감(麥黍餘感)은 글 내용으로 봐서 태종 2년(1402년)경 지으신 것으로 생각된다.

 

시가(詩歌) 29수 중 4수는 고려조(高麗朝)를 노래한 것이고, 나머지는 나라가 망한 후 심정이나, 제주 귀양살이를 노래한 것이다. 유고 전체가 유배생활의 역경 속에서도 후손들에게 사심(私心)을 버리고 바르게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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