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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吾宗)의 연혁(沿革)을 더듬어 볼 때 질곡(桎梏)의 역사 속에서 안고 있는 제반(諸般) 애로사항(隘路事項)들을 숭조애족(崇祖愛族)의 정신으로 극복 발전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가문(家門)의 규범(規範)은 가시적(可視的)으로 가사기록(家史記錄) 문헌인 족보(族譜)의 정리(整理), 선묘(先墓)의 정비(整備)와 보존(保存), 선현(先賢)들의 유물(遺物)이 잘 보존(保存)되어 있는가, 정신적으로 숭조효심(崇祖孝心)이 돈독(敦篤)하고 종친 서로간에 아끼고 도우려는 마음가짐이 함양(涵養)되었는가, 스스로가 족문(族門) 전체의 하나임을 생각하여 보는 정신이 고양(高揚)되었는가를 성찰(省察)하여 기준할 것이다. 혈연 일족의 역사를 나타내는 보(譜)는 조선(朝鮮) 중종(中宗) 정덕구보(正德舊譜)를 효시(嚆矢)로 하여 각 성씨, 가문별로 시조(始祖) 및 중조(中祖)를 중심으로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보(譜)는 제작하기도 힘들었지만은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속에 가문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사회의 변혁 속에 보(譜)를 보존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譜)를 만드는 것은 학식(學識)과 재정(財政)이 겸비(兼備)되어 있어야 하고 과거 반상구별(班常區別)이 엄격하였던 시대에 같은 종씨라도 반상구별에 의하여 수단(收單)에서 제외(除外)되기도 하였고, 그리고 수단금(收單金)을 내야하는 부담과 생존의 시대에 하루하루 연명(延命)하기 힘들었던 친족들은 족보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어 많은 종친들이 등재(登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체 통합보(統合譜)를 제작하기보다는 가까운 일족만의 가승(家乘)을 만들었다.

그 후 시대의 추이(推移)에 의하여 시조의 후손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동보(大同譜)가 해를 거듭하면서 수정(修正) 보완(補完)되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가의 통합보인 대동보(大同譜)는 각 가문들의 가승(家乘)에 의하여 선대들과 기타 기록들이 같아지면서 하나씩 통합(統合)되어 족보가 발전되어 나갔다.

오종(吾宗)도 입도조(入島祖) 이래 그러한 시대적 추이(推移)와 배경으로 통합보를 갖지 못하였다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 점거한 때에 유학자와 현달(顯達)한 인물이 많았던 우리 일족들은 민족의 정기를 일깨우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저들의 속국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참담함을 통분(痛憤)히 여겨 족보를 만들어 단합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김갑병(金甲柄)이 발간한 조천경술보(朝天庚戌譜)와 김순배(金淳培)가 발간한 함덕경술보(咸德庚戌譜)가 있다.

조천경술보(朝天庚戌譜)는 입도조 만희를 입도1세(入島一世)로 예(禮)를 2세로 하여 후찬계(厚瓚系) 일부가 수단을 내어 20질을 발간하였으며, 함덕경술보(咸德庚戌譜)는 입도조(入島祖) 경흥(景興)을 1세로 혁(赫)을 2세, 예(禮)를 3세로 하여 인방(仁邦), 충방(忠邦), 의방(義邦), 필방(弼邦), 예방(禮邦), 안방(安邦), 신방(信邦), 지방(智邦), 용규(用奎), 용호(用瑚), 후찬(厚瓚) 일부, 검(儉)계(系) 종친들이 수단을 내어 총 6권 50질을 발간하였다. 1910년 경술보(朝天庚戌譜, 咸德庚戌譜)를 좌정승공파 최초의 족보로 보는 이유는 목판인쇄(木版印刷)였다는 것이다. 가승(家乘)하고 내용은 거의 같았으나, 가승(家乘)은 붓으로 써서 만들고, 경술보(庚戌譜)는 목판인쇄(木版印刷)를 함으로써 제3자에 의하여 공증(公證)을 받았기 때문이다.

 

1922년 경파 김현주가 중심이 되어 임술석장대동보(壬戌石藏大同譜)를 만들게 되자 제주 종친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해왔다. 임술석장대동보(壬戌石藏大同譜)는 병란(兵亂)때 불에 타지 않게 석굴(石窟:경남 산청군 앙산 양왕릉 앞쪽에 있는 것으로 일명 장보암이라고도 함)에 보존 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대동보였다.

제주도 종친들은 인식부족과 수단금부담(收單金負擔)등으로 참여가 저조하였으나, 김대흥(金大興), 김대희(金大熙)를 중심으로 한 후찬계(厚瓚系) 일부가 수단을 냄으로써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란 이름으로 최초로 제주 만희 후손들이 대동보에 등재되었고, 그 후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임술석장대동보(壬戌石藏大同譜)에 입도조 만희(入島祖 萬希)를 1세, 혁(赫)을 2세로 등재하여 입도조 이후 선조의 대수를 정확히 하였고, 지금까지 경파(京派), 삼현파(三賢派), 사군파(四君派), 시중공파(侍中公派)가 참여해야 대동보로 인정을 받았으나, 임술석장대동보에 좌정승공파를 포함해서 전국 98개 파가 참여 하였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98파가 등재되면 대동보로 인정하였다.

 

1928년 김갑병(金甲柄)이 조천, 한림, 수원에 거주하는 후찬계 종친들과 인방일부 종친이 참가한 석판인쇄물인 무진보(戊辰譜)를 간행하였다. 본 보는 처음으로 제주에서 만든 석판 인쇄물(石版印刷物:남문통 고성주 인쇄소)로서 후찬계가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36년 김창현(金昌鉉)이 수단(收單)을 내어 인방계에서 병자보(丙子譜)를 발간하였다. 1961년(壬寅年) 가락시조 대왕의 탄강(誕降) 기념으로 족보를 만들어 종친들의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중앙가락화수회(花樹會)의 결의에 의하여 안경공파종손(安敬公派宗孫)인 김항수(金恒洙)가 제주를 방문하여 그 취지를 설명하고 제주도 종친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하게 되었다.

이에 제주도 제족들도 족보를 만들기 위해 종친들을 규합하였으며 아울러 좌정승공파종친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묘소(墓所) 및 종가문제(宗家問題) 등 상이(相異)한 점들이 많아 3년 동안 합의가 되지 않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하게 되자 각계파(各系派)의 대표들이 모여서 선수단(先收單) 후타합(後打合)의 원칙을 세우고 족보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좌정승공파 종친회(左政丞公派 宗親會) 초대 회장으로 김희복(金熙福)을 추대하였다.

 

그에 따라 1965년 인방계(仁邦系)일부, 충방계(忠邦系), 의방계(義邦系), 필방계(弼邦系), 예방계(禮邦系), 안방계(安邦系), 신방계(信邦系), 지방계(知邦系), 용규계(用奎系), 용호계(用瑚系), 후찬계(厚瓚系), 검계(儉系) 종친들이 참여한 을사보(乙巳譜)를 발간하였다.

당시 60년대는 보리고개가 있는,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속에서 인천에 거주하는 김희복(金熙福)을 회장으로 추대한 것은 중앙종친회 왕래가 수월하고, 확고한 숭조정신(崇祖精神)과 종친을 위한 희생정신이 투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친회의 모든 경비와 중앙종친회 전국 행사 부담금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 종친회 발전 기틀을 만들었다. 이에 우리 종친들도 종사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이 왕성하게 되었고, 중앙에서 족보를 만들 때도 수단금을 후하게 내게 되었으며, 중앙과의 교류도 많아졌다. 김해시조릉(陵) 보수시에는 제주도 배당금 10만원이라는 거금을 김희복(金熙福)회장 개인이 부담하는 등 이러 저러한 일들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자 종친회 위상이 높아지면서 김희복(金熙福) 회장은 중앙 종친회 감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중앙종친회에 좌정승공파가 제주도종친회 대표로 등록되면서 이후부터 가락제주도종친회(駕洛濟州道宗親會) 전체를 대행(代行)하게 되었다.

 

1966년도에는 재일동포 김기출(金己出)이 당시로는 거금 400만원을 출연하자 입도조 사우건립추진위원회(祠宇建立 推進委員會)를 구성하여 별도봉에 7,879평을 입도조 사우건립부지(祠宇建立敷地)로 매입하였다.

1981년 그곳이 상수도 배수지로 수용(收用)됨에 따라 보상금 2,960만원을 받아 회관매입과 곽지 입도조 보수비 등 위선사업에 전용하게 되어 종친회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을사보(乙巳譜)에 많은 종친이 누락(漏落)되었다는 항의가 있어서 1970년에 경술보(庚戌譜)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부록으로 입도중조내력(入島中祖來歷)을 소개하였고, 육지의 명조상들도 함께 실어 경술보(庚戌譜)를 통하여 전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 이후로 타 파의 족보에도 입도조 척재공(惕齋公)의 내력(來歷)이 실리게 되었다.

 

1974년 중앙종친회가 주관한 전국 통합 대동보인 갑인보(甲寅譜)가 만들어졌으며, 1978년 제주도가락청년회가 결성되어 회장에 김왕진(金王辰)이 추대되었다. 청년회는 몇년 활동하다가 조직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었고, 1995년에 재 창립하게 된다.

 

1979년 전 계파(系派)가 참석한 가락제주도 종친회가 결성되어 초대 회장에 김희복(金熙福)이 추대되었다. 1974년 종친회 창립부터 족보발간 등 종사에 크게 기여하였던 김규형이 6대 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제주유생(儒生)의 대표로 성균관 회의에 참석하는 등 학문이 뛰어났으며, 전국 유명 유생(儒生) 및 명사(名士)들과 친분이 두터워 종친회와 입도조 척재공(惕齋公)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을사보(乙巳譜), 경술보(庚戌譜), 갑인보(甲寅譜)에 서문작성 및 수단(收單)을 내는데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경술보(庚戌譜) 발간시 웬만한 학문의 소유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총편 서문(序文)에 입도조의 내력(來歷)과 함께 타파(他派)의 명조상(明祖上)들을 발췌(拔萃) 수록(收錄)하여 비로소 입중조(入中祖) 척재공이 전국 명조상(明祖上)들과 반열(班列)을 같이 하게 되었고, 제주도 종친회 위상(位上)도 높아졌다.

 

입중조(入中祖) 척재공의 행장(行狀)과 시가(詩歌)를 정리 보존하였으며, 오종(吾宗)의 족보 체계를 확립하였다. 1980년 제주시장을 역임한 김태진(金泰秦)이 7대 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78년 재일 종친 사업가 김창만(金昌萬)이 거금 4천만원을 헌성하여 곽지 입도조 묘역성역화사업(聖域化事業)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3세[禮]의 묘소(墓所)를 중심으로 해서 곽지리 846번지 전(田) 420평, 84번지 전(田) 493평, 848번지 임(林) 296평, 845번지 전(田) 58평을 매입(買入)하였으며, 타인 묘소(墓所) 4기를 이장(移葬)시켰고, 입도조(入島祖) 신도비(神道碑) 및 2세[赫] 단향비(壇享碑), 3세[禮] 묘비(墓碑)를 건립함과 동시에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등대석(燈臺石), 동자석(童子石), 3세[禮]묘 산담증수 등 묘역 보수공사 일체를 완성하게 되었다.

1차 성역화 사업(聖域化 事業) 이후 많은 종친들이 종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종친들이 단합하는데 크게 기여 하게 되었다.

 

다음해 입도4세[奉] 묘소와 배숙부인(配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묘소를 보수하고 비석(碑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등대석(燈臺石), 문인석(文人石), 동자석(童子石)등을 세워 선대의 묘소들을 차례대로 정비하였다.

또한 김창만 족장이 2천만원을 희사(喜捨)하여 줌으로써 입도4세손인 검(儉) 묘역 정비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1985년 5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88년 수묘(修墓) 및 묘역정비사업을 착공하고 익년(翌年) 9월에 묘역정비사업을 완성하였다.

 

1984년 9대 회장에 김종은(金鐘殷)이 부임하였으나, 일신상의 문제로 회장을 사임하자 그해 11월부터 부회장 김진용(金鎭龍)이 회장 대행을 하다가 85년 입도4세[奉]이 배(配) 이씨(李氏) 묘(墓) 수묘 후 제막식(除幕式) 및 정기총회를 열어 김진용을 회장으로 선임하게 되었다.

 

1985년 3월 30일 종무위원회를(宗務委員會)을 구성(構成)하였다. 좌정승공파 후예들이 대동 단결하여 위선사업을 시도하고, 종중간(宗中間)의 난제(難題)들을 해소(解消)하며, 각 파별로 소지(所持)하고 있는 가승보(家乘譜)상의 사소한 차이로 인한 이견(異見)을 조정하여 통합보(統合譜)를 편찬,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그후 1987년 오종(吾宗)의 염원인 종친회관을 매입하게 되었다. 1966년 재일교포사업가 김기출(金己出)이 헌성(獻誠)한 400만원으로 입도조 사우건립 부지로 별도봉에 7,879평을 매입하였다가 상수도 배수지로 수용(收用)됨에 따라 그 보상금으로 신제주에 다시 회관 건립 부지를 매입하였다.

이에 따라 회관건립 추진 위원회를 만들어 취지문을 만들고 제일교포 및 도내 종친들에게 적극 홍보하여 회관건립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후 조감도(鳥瞰圖) 작성, 부서장(部暑長) 인선 등 1억5천만원 모금 계획을 세우고 여러 종친들의 십시일반(拾匙一飯) 기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삼도1동 76번지에 대지 65평, 건평 150명, 구 가락회관 건물(建物)이 매물(賣物)로 나와 긴급 이사회를 거쳐 신제주 회관 부지를 매각(賣却)하고 종친들의 모금한 회관 건립기금을 합하여 1987년 12월 12일 매입하게 되었다. 총 매입 금액은 1억 7천 5백만원이며, 김기출의 성금으로 매입한 신제주 부지 매각(賣却) 대금과 재일동포 사업가 김두윤(金斗潤)이 5천만원, 나머지는 98명의 종친들이 성금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오종(吾宗)은 자존(自尊)과 긍지(矜持)를 가지게 되었고, 종친회가 한 단계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대내외적으로 성장하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종친회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무실을 갖추고 상근자(常勤者)를 두어 종사일을 체계적으로 하게 되었으며 성금으로 운영하던 종친회가 임대수입을 얻게 되어 많은 재정적으로 부담을 덜어주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내 중심지에 3층 건물을 종친회 사무실로 갖는다는 것은 다른 종친회의 부러움이 아닐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우리 종친들의 단합된 모습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입도5세[禿廻]의 실전(失傳)으로 인하여 종친회에서 고심하던 중에 안방계 대복문중회에서 일천만원의 경비를 지원하여 입도조 묘역에 제단을 만들고 단향비를 세웠다. 이후 1989년 기사보(己巳譜)가 만들어졌다.

 

1992년 11대 회장으로 김수진(金洙珍)이 부임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무실 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무국장제도를 도입하여 사무국장(事務局長)과 총무(總務)를 사무실에 상근(常勤)시켰다. 그 결과 중앙 종친회의 업무지시 및 협조사항 처리와 각종 회의 준비 및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어 입도조 묘역조성활성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재원난으로 미루어 오던 입도조묘역 진입로 포장사업이 김수진(金洙珍) 회장의 성금으로 인접토지(隣接土地)를 매입하고 북군의 지원을 받아 완공하게 되자, 1995년 3월 정기총회에서 입도조 묘역 정화 사업이 논의되어 ‘정화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김순현(金淳賢)이 추진위원장을 맡게 된다. 1996년 7월 21일 준공시까지 토지매입, 굴곡을 펴기 위한 경계측량, 토목공사, 조경공사, 비석설치, 송례문(松禮門) 건축, 울타리 공사 등의 정화사업이 추진위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졌다.

 

성금 참여 인원은 5만원 이상 290만원까지 참여가 255명, 300만원 이상 참여자 98명, 500만원 이상이 8명, 1,000만원 이상이 1명(재일본 김창인 회장), 2,000만원이 2명(김수진 회장외 1명) 등 총 참여인원 364명에 총 성금액은 4억9백8십만원이었다.

총 공사비는 토지매입비 43,337,550원, 토목공사비 64,412,900원, 조경공사비 66,300,000원 좌대공사비 20,200,000원, 비석 설치비 47,050,800원, 송례문(松禮門) 공사비 20,050,000원, 부대비 37,648,750원 등 296,000,000원이었다.

공사비를 제외한 잔액 이자 4,150,000여원과 함께 118,000,000원은 묘역관리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재원(財源)등의 사유(事由)로 인하여 묘역(墓域)의 축성(築城) 및 부대시설(附帶施設)을 갖추지 못한 우리 후손들은 성묘시(省墓時)나 시 ‧ 묘제(時 ‧ 墓祭)때마다 부끄럽고, 죄스럽던 마음을 공감하고 있던 차에 정화사업을 통하여 그러한 마음의 부담을 어느정도 덜어내고, 숭조상문의 정신으로 서로 결속하고 단합하게 되어 종사에 있어서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 5월에 800여명의 종친들의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회천분교에서 단합대회(團合大會)를 가졌다. 지금까지 족보제작, 선묘수묘(先墓修墓), 종친회 조직 등 많은 일들을 마치고 종친끼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단합의 한마당 잔치였다. 이날 경비 전액을 회장 김수진(金洙珍)이 부담하여 종친들을 더욱 기쁘게 하였다.

종친회는 우역고절 속의 시련의 겪으면서 많은 난관을 극복 해결하면서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종친회에서는 2세의 교육(敎育)은 종사의 발전임을 인식하여 청‧부녀회(靑‧婦女會)를 조직(組織)하게 되었다.

 

1994년 11월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듬해 1995년 2월 창립총회를 거쳐 초대 회장에 김희상(金喜相)이 선임되었다.

그 후 청년회는 김해대제, 입도선묘 및 선조 시향제(時享祭) 참석, 수묘시 성금 동참 등을 통하여 훌륭한 선조를 둔 자손임을 자각(自覺)하여 가락제주총람(駕洛濟州總覽 左政丞公派 編) 편찬(編纂)에 착수하게 되었다.

사무실이 협소하여 증축(增築) 논의가 있게되자 1996년 당시 제주도의회 의원이던 김창구(金昌玖)가 공사비 800만원을 쾌척(快擲)함으로써 회관 3층 종친회 사무실을 증축하게 되었다.

그 후 1997년 부녀회를 창립하자는 종친회 결의에 의하여 주비위원을 구성하였고, 이듬해 98년 10월 창립총회(創立總會)를 가져 초대회장에 강승원(康升瑗)이 선임되었다.

이제 종친회는 비로소 양날개를 달게 되었으며 종친회 모든 조직을 완비하게 되었다. 당해 10월 입도 4세(奉) 묘소가 협소하여 시향(時享) 때 배례(拜禮)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인접(隣接) 토지(土地) 200평을 매입하여 수백명의 자손들이 모여 한꺼번에 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입구도로 경계측량 및 보수를 하였다.

 

한편 청년회는 여러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데 특히 〖가락제주총람 좌정승공파편(1999,세림원색인쇄사,1394면)〗의 발간은 우리 종친사(宗親史)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의 뿌리가 위대한 가락국 수로왕이며 입제중조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국되면서 신왕조에 중신으로 등용하려 불렀으나 치사이군의 절개를 지켜 항절불굴하다 제주에 유배된 고려 유신 좌정승 척재공의 후손임을 내‧외에 과시하고 위선(爲先), 부종(扶宗), 계도(啓導)사업을 위하여 종친간 화합, 목종, 단결을 목적으로 편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명록을 중심으로 일을 시작 하였으나 종친회원들의 무관심과 전문인력의 부족으로 지체되기 시작하자, 청년회와 종친회에서 전문가를 초대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여 일임하기로 하였다.

당시 청년회 상임이사 김대은을 편찬위원장으로 하여 김봉옥(당시 계찬 문중회장), 김경흡(당시 종친회 부회장), 김순익(당시 종친회 부회장겸 충방 문중회장), 김훈관(당시 종친회 사업부장)이 위원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종친회(회장 김수진)와 청년회(회장 김희상)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3년여동안 방대한 자료수집과 고증을 거치면서 위원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종친회 김수진회장, 청년회 김희상 회장, 각 문중회장 등 뜻있는 여러종친들이 자발적참여로 알차게 자료를 수집하였다. 편찬위원들은 가락사의 정리를 위하여 1년여 동안 밤샘을 거듭하였고 가락화보를 만들기 위하여 김해지방을 수차례 탐방하였으며, 척재유고를 번역하기 위하여 서울을 수십차례 드나들었다. 특히 김대은 편찬위원장은 종친회 발자취를 쓰기 위하여 족보를 뒤지고 많은 종친들에게 녹취를 하였으며 입도조 이후 화보와 묘역도를 만들기 위하여 풍수지리학을 1년여 동안 공부하고 전문가들에게 사사 받았으며 제주도 전역을 수십차례 누비고 다니며 산수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 결과 입도조 이후 선조의 묘역은 모두 명당으로 확인 되었으며 자손의 번창하고 훌륭한 인물의 탄생을 입증하기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효진신현숙록을 집필한 김봉옥 족장께서는 수백권의 제주도 역사자료에서 우리 가문을 빛낸 조상들을 찾아내고 검증하여 가락제주총람에 수록하였다. 특히 6천여 종친들의 인명록을 만들기 위하여 주소를 파악하고 사진을 수집하여 주신 12개 지파 문중회장들의 노고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으며, 이를 통하여 긍지와 보람도 가질 수 있었으며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어 ⌜가락제주총람 출판기념식⌟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행사로 이어지게 된다.

 

서기 1999년 8월 8일 우리 제주도 종친회에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기념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날은 제주도 종친 5,500여명이 한라 체육관에 모여 ⌜가락제주총람 출판기념식과 한마음 체육대회⌟를 가졌던 것이다.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고 전날 태풍이 불었지만 우리 종친들은 처음있는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바쁜 일손을 놓고 행사장으로 참석하여 모두가 기쁘다고 감탄하며 종친들의 저력을 과시하고 긍지와 보람을 갖게 된 행사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님과 김종필 국무총리께서 축하 전문을 보내와 많은 종친들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종친은 해녀인 부인에게 그날 물질을 가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벌금을 감수 하면서 행사에 참석시켜 많은 종친들이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전날 제주시내 오리엔탈호텔에서 가진 전야제에는 중앙종친회장단, 중앙청년회장단, 전국 청년회장단 및 제주도종친회 임원 등 300여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특히 입도조 척재공의 시를 낭송(김경흡 편찬위원)하여 행사의 뜻을 더욱 깊게 하였다.

익일 행사는 1부 출판기념식 2부 한마음 체육대회를 가져 종친간의 돈독한 정의를 나누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가졌던 뜻있는 날이었다.

종친회가 결성되어 그 동안 족보편찬, 수묘사업, 회관매입, 가락제주총람 편찬 등 수많은 사업을 하면서 많은 종친들이 종사에 참여하게 되자 종친회 사무실 역할이 중요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87년 12월 12일에 매입한 종친회관(대지 65평, 건평 150평)은 회의장소가 협소하여 도 종친회 총회시는 외부 회의장을 빌려야 했고, 건물이 노후하여 관리비가 많이 들고 시내가 번창하면서 교통이 불편할뿐더러 점포임대가 쉽지 않아 2002년 3월 31일 도종친회 총회에서 회관이주를 결의하게 되었고 추진위원장에 김인탁 족장을 위촉하였다. 그러던 중 제주시(천수로 44)에 부지 110평에 건평 159평(지하 24평, 1층 66평, 2층 69평) 짜리 건물을 6억5천만원에 매입하여 2004년 1월 30일 이사하므로써 종친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무실 및 회의장으로 이용할 공간이 없어 종친회관 3층에 35평을 증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후 2005년 3월 정기총회에서 제주도종친회 16대 회장으로 김인탁(金仁卓, 儉系)족장이 선출되어 취임하고, 구 종친회관을 매각하여 새 종친회관 매입시 차입금을 상환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나 종친들이 경제사정이 여의치 못해 모금이 부진하여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였다. 2008년 3월 정기총회에서 ‘제주도종친회 제17대 회장으로 김인탁 회장’이 재선되어, 부채 상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2009년 재일본 종친인 남해회관(주) 김창인(金昌仁, 安邦系) 회장의 2억원을 헌성함에 따라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3월 정기총회에서 ‘좌정승공파 종친회 제18대 회장으로 김동균(金東均, 弼邦系) 족장’이 선출되어 취임하고, 2013년 4월 김해 숭선전 춘향대제시 아헌관으로 참제하는 등 중앙종친회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2013년 6월에는 제주도청년회(회장 김태문) 사무실을 제주도종친회관으로 입주하게 함은 물론 종친회 ․ 청년회 ․ 부녀회와의 유대를 돈독히 하였다.

 

2014년 3월 정기총회에서‘좌정승공파종친회 제19대 회장’으로 “입도 7세조 처사 용지묘역(用砥公)성역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김대옥(金大玉, 義邦系 21世) 족장”이 선출되어 취임하였으며,“모든 종친간의 화합과 단결”을 최우선 과제로 슬로건을 내걸고, 종친회 운영을 활성화하기 위해 12개 지파, 부녀회, 청년회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 모든 종친이 종사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화합 단결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2014년 10월 중앙종친회 김동균 수석부회장(18대회장)으로부터 2천만원을 헌성 받아 종친회관 3층에 20평을 증축하였고 2014년 11월에는 종친회 재정 운영이 어려워지자 김수진(제12~15대 회장)고문으로부터 종사 발전기금 2천만원을 헌성 받아, 종친회관 대수선비를 적립하기 시작하는 등 종친회원 간의 단합을 통한 종친회 발전을 위한 기반구축에 기여했다.

 

2017년 3월 정기총회에서 “좌정승공파 종친회 제20대 회장에 김호선(金好先, 安邦系) 족장‘이 선출되어 취임했으며, 회칙개정소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월간의 논의 끝에 2017년 9월 종친회 회칙을“김해김씨좌정승공파 정관”으로 제명을 변경하는 등 전면 개정하고 모든 종친이 정기총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했으며, 누수 되는 종친회관 옥상을 900만원을 들여 방수공사를 완료했다.

 

2018년 5월 11일 입도조 묘역 입구 애월읍 곽지리 837-2 139㎡(42평)을 소유자 애월읍 곽지리 김형건으로부터 8,000천원에 매입하고, 동 부지면적이 협소하여 분할이 불가능하자 매매공증을 받아 놓았다.

 

특히 종친회 명의로 농지를 이전 등기할 수 없음에 따라 종친명의(宗親名義)의 농지 3필지를 종친회 명의로 등기하기 위해 2018년 5월 14일 입도조 묘역입구‘송례문(松禮門)’을 철거하고, 애월읍 곽지리 788-1번지 1,077㎡(326평), 곽지리 849번지 701㎡(212평)의 농지를 4천만원을 투자하여 정리했으며, 2018년 5월 25일 농지보전부담금 25,890천원을 제주시에 납부하고, 입도조묘역 정화사업조감도 설계비, 등기 이전비 등 총비용으로 50,543천원을 투자하여 묘역 농지 지목을 변경 이전 조치했는데, 이 재원은 종친회관 임대보증금 23,000천원과 대수선비 적립금을 사용했다.

 

이와 같이 우리 종친회의 현안 사항으로 남아 있던 종친명의(宗親名義) 농지 애월읍 곽지리 788-1번지(326평)과 애월읍 곽지리 848번지(212평) 김순현 종친명의 농지와 애월읍 곽지리 788-3번지 723㎡(218.7평) 김태행 종친명의 농지 총 3필지 2,501㎡(757평)을 2018년 6월 18일“김해김씨좌정승공파종친회”로 이전등기를 완료했다.

 

뿐만 아니라 2018년 10월 7일 입도조 시향제시 “제3차 입도조 묘역정화사업추진계획”을 임시총회에서 승인을 받고 ‘정화사업추진위원회(회장 김태훈, 후찬계)’를 구성하고 헌성금 1차분 2억1백여만원을 모금하였으며, 회장 재임 중 6,000여만원을 종친회에 헌성하고, 김해김씨 읍․면․동지회 설립을 추진하여‘김해김씨애월읍지회(회장 김태규, 회원 730명)’를 구성하는 등 종사발전에 헌신하여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2019년 1월 26일 정기총회에서‘좌정승공파종친회 제21대 회장’에 김주언(金柱彦, 用瑚系 21世) 족장이 선출되어 취임하고, ‘제3차 입도조 묘역 정화사업’을 차질 없이 성공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돌이켜 보건데 1393년 척재공(惕齋公)께서 입도한 후 620여년이 지난 지금 숱한 영욕(榮辱)의 역사 속에서 선조들의 충절(忠節)과 위업(偉業) 등 찬란한 발자취를 되새기고, 광속으로 변화하는 시대 환경과 조류(潮流)에 따라 우리 종친회를 모든 종친이 화합 대동단결(大同團結)단결하여 새로움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더욱 발전(發展)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오종(吾宗)은 한 핏줄이요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서로 아끼고, 도우며 앞으로 어느 씨족 못지않게 선조를 받들 때, 우리들은 선조들에게 떳떳한 후손이요, 후손들에게는 부끄럼 없는 조상으로 남을 것이다.

 

<참고문헌>

ㅇ 가락제주도종친회,⌜駕洛濟州總覽⌟, 1999

ㅇ 본 원고는 가락제주총람에 이어서 김해김씨좌정승공파 김익선 종무위원님께서 집필하여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