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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조 척재공 행장(入島祖 惕齋公 行狀)

 

공(公)의 휘(諱)는 만희(萬希) 또는 경흥(景興)이며 자(字)는 여운(汝雲), 호(號)는 척재(惕齋) 또는 월포조수(月浦釣叟)라 하셨다. 관(貫)은 김해(金海)로 가락국(駕落國) 태조수로왕(太祖首露王)의 51세손(世孫)이시고, 신라(新羅) 태대각간(太大角干) 흥무왕(興武王) 휘(諱) 유신(庾信)의 39세손(世孫)이시다. 조(祖)는 봉상대부삼사부사(奉常大夫三司副使) 휘(諱) 재백(再伯)이시고, 고(考)는 사마(司馬) 휘(諱) 기서(麒瑞)이시다.

공(公)은 고려말(高麗末)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서기 1314)인 갑인(甲寅)년에 토산(兎山:황해도 금천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문하부(門下府) 좌헌납(左獻納) 재임시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입조하게 되자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을 소척(疏斥)하는 상소문(上疎文)을 올릴 때 종간(從諫)하시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이존오(李存吾)는 유배(流配)되고 공은 파직(罷職)되었다.

그러나 공민왕 20년(1371년)에 신돈(辛旽)의 반역(叛逆) 음모가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배되어 참형되자 공은 다시 복직(復職)되어 뒤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오르고 이어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좌정승(左政丞)을 배(拜)하였으나 병(病)으로 사양(謝讓)하시고 고향인 토산⌜월성⌟으로 낙향하였다.

공양왕 4년(1392년) 7월에 이태조(李太祖)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면서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공(公)을 새 왕조(王朝)의 중신(重臣)으로 불렀으나 치사이군(恥事二君: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부끄럽다)이라 하여 나가지 아니하니 권간(權奸:간사한 권신)들이 정몽주당(鄭夢周黨)이라 죄를 꾸며 태조 2년(1393년) 10월에 제주로 유배(流配)하였다.

공(公)은 애월포(涯月浦)로 상륙하여 못가 적려(謫廬)에 따라온 손자 ‘예(禮)’와 더불어 망국(亡國)의 한을 달래며 사람으로서 살아나갈 도리를 가르쳤다. “밭을 갈면서도 글을 읽어 충효(忠孝)와 인의(仁義)에 힘쓰는데 자기 사심(私心)이나 잡념(雜念)을 버리고 절조(節操)를 지키어 스스로 삼가며 자기 몸을 바르게 닦으라”고 가르쳤다. 이로 인하여 지방의 자제들도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공(公)과 전후하여 새 왕조에 불복한 까닭으로 제주에 유배된 대제학 한천(韓蕆)과 교리, 이미(李美)를 삼절신(三節臣)이라 일컫는다.

태종(太宗)이 등극하면서(1401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게 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내렸고, 공(公)에게도 시면령(赦免令)이 내려졌다. 공(公)은 11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이곳 제주에 손자 ‘예(禮)’를 홀로 남겨둔 채 ‘조상을 섬겨야 한다’는 일념(一念)으로 태종(太宗) 4년(1404)봄에 고향 토산⌜월성⌟으로 귀향하시어 그해 7월 6일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91세이셨다.

유배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양해원사록(襄海原辭錄) 및 은감유성록(殷鑑幽省錄) ․ 맥서여감(麥黍餘感)과 수십편의 시가(時歌)를 남기셨는데 어느 글에서나 구구절절 고고(孤高)한 절조(節操)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