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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 김필원(金弼遠)과 김평원(金平遠)

 

김필원(金弼遠)은 입도조 좌정승공의 21세손으로 해은 김희정(海隱 金羲正)의 손자이다. 생부 김항각(金恒恪)과 모친 풍천임씨(豊川任氏) 장남으로 1910년에 조천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중부(仲父) 성균관 진사 항유(恒裕)가 후가 없으므로 그 뒤를 이었다.

 

어려서부터 조부로부터 애국하는 길을 배우더니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때 조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솔선 참가하였다가 검거되어 1919년 5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8개월 징역형으로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항일의 뜻은 변치 아니하다가 해방 후 1950년에 51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에 추서하였다. 김평원(金平遠)은 입도조 좌정승공의 21세손으로 부친 김항각(金恒恪)과 모친 풍천임씨(豊川任氏)의 5남으로 1915년에 조천에서 태어났다. 이는 김필원(金弼遠)의 생각 막내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항일정신이 강하여 1932년 18세 때 마을 청소년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기를 “조선은 일본에 병합된 지 22년에 우리들은 그간에 일본 때문에 정치적으로 무한한 압박과 착취를 당하여 털끝 만한 자유도 없고, 부모형제는 대판 노동시장이나 또는 압록강을 건너 유랑할 뿐만 아니라 비참한 상황을 맞고 있으니 우리들 소년들은 일치단결하여 일본을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을 계책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가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1년 반을 선고받아 동년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여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다. 그 후 1942년 조천에서 김시용(金時容)이 주도 하는 항일 소비조합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함께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이 언도되어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