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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김순(金順)과 효부 이씨(李氏)

 

김순(金順)은 입도조 좌정승공의 19세손으로 부친 김정흥(金廷興)과 모친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이에 철종 6년(1855년) 곽지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지효(至孝)하여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었다.

성장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 유생 이기석(李基錫)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부인 또한 남편에 순종하였다. 1880년 26세 때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 속에 정성을 다하여 치상하였다. 이어서 부친 또한 병으로 눕게되자 김순 부부는 밤낮으로 시탕9侍湯)하여 하늘에 쾌차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점점 위독하여 숨이 넘어갈 듯하자 부인 이씨가 단지(斷指)하여 수혈하니 조금은 편하므로 이어서 김순이 단지(斷指)하여 수혈하였더니 회생하여 회복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여 부부의 효행을 관에 보고하니 고종 9년(1882년) 박선양(朴善陽) 복사는 효자 효부의 완문(完文)을 내렸다.

 

그러나 김순은 부친이 1883년 8월에 종명하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중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 1886년에 32세로 종명하였다. 부인 이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외로움 속에 두 사람 사이에는 후가 없었으므로 동생 재표(才杓)의 아들 달생(達生)을 양자로 삼아 아들이 사는 애월리에 옮겨 살았다.

 

이씨는 달생에게 자애와 근면으로써 어버이의 도리를 다하던 중 병을 얻어 눕게 되자 달생은 지성을 다하여 간병하였다. 광무 11년(1907년) 이때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나라의 빚을 국민들이 힘을 모아 갚으자는 운동)이야기를 듣고 이씨는 아들 달생을 불러 말하기를 “남자라면 혹 뜻이 있어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이 많겠지만 여자의 몸으로는 만약 이러한 때를 놓치면 언제 나라를 위하겠는가”하면서 지금까지 몸소 마련하여 두었던 수의(襚衣)를 냊면서 곧 내다 팔고 오라고 하였다. 달생은 분부에 따라서 팔아 80량을 갖다 드리니 지팡이를 집고 회소(會所)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신우면장 문두천(文斗天)은 곧 군데 이 사실을 보고 하니 윤원구(尹元求)군수가 내린 완문(完文)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부부가 단지(斷指)하여 사경에 이른 어버이를 회생시킨 효행으로 김순에게 내린 앞서의 완문에 소상히 적혀 있었는데 남편이 죽고 부인은 늙었으니 오히려 작설(綽楔:충신효자 열녀가 난 집안을 표창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는 일)이 궐하였음은 참으로 결전(缺典)이었는데 이제 국채보상의 날에 흠연히 수의(襚衣)를 팔아 80량의 많은 돈을 연출(捐出)하였으니 충효(忠孝)가 겸전(兼全)함이 가위 규중열장부(閨中烈丈夫)라 할 것이다. 어찌 만만흠탄(萬萬欽歎)하지 않겠는가. 그 포양지전(褒攘之典)은 마땅히 규정에 따라 상부에 보고할 것이나 군(郡) 자체에서도 권장하지 않을 수 없으니 본리 연호(烟戶) 잡역(雜役)은 일체 견감(蠲減:세금의 일부를 탕감함)하여 주고 풍속을 교화하여 백성을 감화하는 덕을 수립하기 위하고, 민속을 장려하는 뜻으로 이 완문을 만들어 주노라”하였다. 이씨는 그 후 천수(天壽)를 누리어 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