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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김용징(金龍徵)

 

김진사(金進士)는 입도조 좌정승공의 17세손으로 애월읍 납읍리에서 부친 봉철(鳳喆)과 모친 남양홍씨 사이에 순조 9년(1809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운경(雲卿) 호는 정헌(靜軒)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글을 읽혔다. 어느날 금산에서 삵괘잉를 보고 놀랐다고 집에 가서 말하자 부친이 그 말을 글로 써보라 하였더니 즉석에서 “운대재차, 이형진복, 번쾌장군(云大哉此, 理形瞋目, 樊噲將軍:이 크기를 말하자면 삵괭이 눈을 부릅 뜬 모습이 번쾌장군이더라)”하니 이를 본 사람들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전북 부안(扶安) 명유(名儒)를 찾아가서 수학하고 1832년 24세 때 전주 사마시(全州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836년 부친상을 만나 장례 치산하고 1838년 30세 때 본주에서 시행된 사마시에도 합격하였다. 헌종 7년 1841년 이원조(李源祚)목사가 부임하여 탐라지를 새로 닦고자 할 때 그 담당자를 선발하는데 도감(都監)에 김영락(金英樂) 양관(梁觀), 제주목 유사(有司)에 강제진(姜薺鎭) 김용징(金龍徵), 대정에는 강석호(姜錫瑚), 정의에는 오형국(吳亨國)을 선정하여 탐라지를 만들었다. 김진사는 당시 33세였는데 이미 유림간에 문필(文筆)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843년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진사시에 3등 58인째로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돌아와서 제주향교 교수에 임명되니 오로지 후진 양성에 전력하여 청유(淸儒)로서 추앙을 받았다.

철종 6년(1855년) 제주향교에 계성사(啓聖祠: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를 건립하는 것을 조정에 진정하여 허락되었으므로 동년에 계성사를 건립하였다. 계성사의 현판은 김진사의 글씨이다. 계성사는 서울 성균관에만 있고 지방 향교에는 없는 것인데 이때 제주향교는 계성사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는 장령 김명악(金命岳), 진사 변지열(邊之悅), 김성호(金性昊), 김기추(金基樞), 강승모(姜昇模), 태사관 안양필(安良弼), 교수 양지권(梁志權), 양재권(梁在權)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한시집(漢詩集) 십여권을 남기고 1890년 82세로 영면(永眠)하였다. 1936년 4월 제주향교 김익수(金翊洙), 정의 강학서(康鶴瑞), 대정향교 강철호(姜哲鎬) 등 향교 직원(直員:典校)과 후학들이 성금을 모아 애월읍 납읍리에 김진사의 송덕비를 건립하여 추모의 뜻을 표하였다.

 

▲ 진사 김용징(金龍徵)